경주를 다녀왔습니다. 경주만 다녀왔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영주 부석사와 소수서원, 안동 하회마을을 함께 다녀왔습니다.
이번에는 먼저 영주 부석사를 두번째편에 소수서원과 하회마을, 그리고 마지막편에 경주 불국사를 소개합지요. 기대하시길~

↑ 어~시원타, 소수서원 학구재 마루에 누워서...
영주에서 경주로 가기전 소수서원에 들릅니다. 부석사에서 30분도 안걸리는 길에 있고 부석사에서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경주로 가기위해선 지나가는 길에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서원(1542년.중종 37)이라고 합니다. 왜 다들 국사책에서 배우셨죠? 풍기군수 주세붕이 고려때 유학자 안향을 모시는 백운동서원을 세우고, 그 후 1550년 퇴계 이황이 왕으로 부터 현판·서적·토지·노비을 하사받아 소수서원으로 만들었죠.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에도 살아남은 47개의 서원중 하나랍니다.
주차장은 정말 크고 넓은데 사람들은 별로 없더군요. 입장권을 사면서 관광안내도를 부탁하면서 그랬죠.
"영주군 지도 좀 주세요"
그러나 안에 계시던 분 왈
"여~ 신데요" (경북 북부사투리로 들어야 제맛입니다. 주변에 경북분 계시면 한번 물어보세요. 저희 어머니가 대구, 아버지가 울진이라서 아는데 경상도 사투리도 억양에 차이가 있습니다. 대구가 '능교체'라고 한다면, 경북 북부의 말은 '니껴체'라고 한다네요. 대구 지방의 "밥먹었능교"는 이 동네 사투리로 "밥 먹었니껴"지요)
"네?"
"여는 시라고요, 영.주.시. 사람이 20만이나 사는데"
"아~네 죄송합니다." (제가사는 분당은 50만명 사는데도 성남시 분당구입니다. 시민의 자존심이랄까? 군민하고는 틀리다는 거겠죠?)


소수서원에 들어서는 길은 운치있는 소나무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데 나이가 적게는 300년에서 1000년이 되는 것도 있다고 하네요. 공부하는 서원의 소나무라서 그럴까요? '학자수'라는 이름이 붙어 있더군요.
← 노출이 오버됐다.

소수서원옆에는 죽계수라는 꽤 큰계곡물이 흐르는데 소수서원 입구앞에는 죽계수을 바라보는 경렴정이라는 정자가 있는데 이곳에서 죽계천건너를 바라보면 퇴계 이황 선생이 지었다는 취한대가 죽계천 옆에 있습니다.
경렴정 →

↑ 주세붕 선생이 쓴 경(敬) 자와 퇴계 이황 선생이 쓴 백운동(白雲洞) 자.
그리고 경렴정에서 바라뵈는 죽계수 건너편에는 경(敬)과 백운동(白雲洞)이란 글씨가 음각된 바위가 있는데 처음 주세붕이 숙수사라는 절을 폐하고 서원을 건립할때 절에 있던 불상들을 모두 이 바위 아래 깊은 소(沼)에 던져 버렸답니다.
딴에는 성리학을 공부하는 양반이라고 그러셨겠죠? 하여간 우리나라 고집통들은 하나만 죽어라 믿으니..하여간 그래서 한맺힌 불상들이 밤이면 소를 첨벙거리며 뛰어올라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어 이를 들은 주세붕이 소위의 바위에 주자철학에서 마음가짐을 바르게하는 수양 의미를 가진 경(敬)자를 세기자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하는 전설따라 삼천리~가 있습니다.
이 경(敬)자의 또다른 전설로는 1457년 서원이 생기전 숙수사에서 단종 복위거사를 모의하던 영남의 선비들이 세조에게 들켜 세조가 보낸 관군들에게 절도 불타버리고, 선비들이 죽임을 당해 이 죽계수 깊은 소에 던져졌답니다.

선비들의 시신에서 흘러나온 피가 죽계수를 타고, 10여리 흘러 멎은 곳을 지금도 피끝 마을로 불리고 있다는데 뜻을 이루지 못하고 되려 죽은 선비들의 넋이 밤만 되면 울어대 원혼을 달래기위해 주세붕이 경(敬)자를 세기자 조용해졌다는 두가지 얘기가 전해집니다.
← 일신재와 직방재
경(敬)자위에 백운동(白雲洞)은 퇴계 선생이 백운동 서원을 소수서원으로 만들때 취한대를 세우고 세겼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방방곡곡 어디나 전설이 없는 곳이 없군요. 전설따라~ 삼천리... 다음엔 또 무슨 전설이 있을지...

소수서원은 학생이 공부하고 머무는 시설-강학당, 학구재, 지락재와 스승이 머무는 일신재, 직방재 그리고 장서각, 안향,주세붕의 위패를 모신 문성공묘, 안향 선생의 영정을 보관하는 영정각이 있는데 유물들은 서원뒤 사료전시관에 전시해놓았다.
← 소수서원 전경
소수서원 사료전시관에서는 바위에 새겨진 '경(敬)'자를 탁본뜨거나 퇴계 선생님의 '백운동' 글씨를 붓으로 따라 쓸 수 있도록 몸으로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돕고 있더군요. 아무래도 몸으로 느끼면 쉽게 잊어버리지는 않겠죠.
이제 소수서원을 뒤로하고 양반의 고장 안동으로 향합니다.

안동 하회마을 모르시는 분들은 없겠죠.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이 다녀간후 더욱 유명해졌고 중앙고속도로의 개통이후 서울과 더욱 가까워져 많은 사람들이 찾는듯 합니다.
← 담넘어 올려다본 하회마을의 어느집
안동은 뿌리깊은 양반문화의 전통이 여기저기 있는 곳입니다. 풍산 류씨와 의성 김씨, 안동 김씨, 예안 이씨 등등 많은 양반들의 종택들과 그들이 공부하던 도산서원, 병산서원의 서원들.
남인들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안동의 양반들은 요새 TV에서 방영되고 있는 '장희빈'의 무대가 되는 17세기 조선 숙종때를 끝으로 정치의 중앙에서 물러납니다.

← 고즈넉한 하회마을의 오후
정조때 탕평의 일환으로 잠시 정권을 잡기는 하지만 안동 양반들은 노론에 밀려 출세의 길이 멀어지고 권력에서 밀려나면서 학문연구와 인재양성 등으로 체면을 유지합니다.
그래서 안동사람들은 정승판서를 많이 배출한 것보다 나라가 위급할때 일어선 의병, 독립운동에 안동 출신들이 많다는 것에 더 자부심을 느낀다고 합니다.

이런 자부심으로 살아가는 안동의 양반들이 사는 곳-하회마을은 바로 풍산 류씨의 집성촌입니다. 안동 하회마을에 들어서는 길옆으로 풍요로운 풍산들이 있고 간고등어와 헛제삿밥 식당들이 줄지어 서있습니다.
어느 양반집의 담벼락. 이제는 다른 곳에서는 볼수 없는 흙으로만든 담벼락이 정겹다.→
이제 관광지로 전락해 버린 양반의 마을, 이제 하회마을에서 볼 수 있는 사람들은 장삿군들뿐. 조용한 양반의 마을은 주차장에서부터 복잡한 곳으로 전락해버리고 하회마을의 주민들은 집만 남겨두고 다른 곳에서 사는 듯합니다.

관광객들이 너나없이 벌컥벌컥 출입하는 곳에서 가정집을 꾸리기란 무리겠죠. 하지만 그런와중에서 하회마을의 골목길들은 정겹기만 합니다.
← 하회마을의 양반집. 하회마을에는 북촌댁, 남촌댁, 양진당 등 풍산 류씨의 종택들이 자리잡고 있다.
내려쬐는 태양아래 구불구불한 골목길들을 걷고있노라면 마치 조선시대 어느때인가 와있는듯한 느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골목길을 헤메다 마을 가운데 열려있는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류성룡 선생이 태어났다고 하는 양반집이 나옵니다.
낙동강이 풍산들을Ω자를 쓰듯 휘돌아나가므로 '물돌이동(하회동:河回洞)'이라고 한답니다. 이런 지형을 풍수로 말하면 태극형, 연화부수형이라고 해서 큰 인물이 나오는 자리라네요.

하회마을을 돌아보고 오는 길, 어느 식당에 들러 간고등어 정식과 헛제삿밥 정식으로 요기를 채웠습니다. 짭짜름한 고등어 자반과 특이하게 간장과 나물을 함께 헛제사밥을 비벼먹었다.
잘 기억이 안나는대 북촌댁의 대문인 것 같다 →
음.. 역시 본고장의 맛이 제일인 것 같다. 같이 간 친구-인터콘티넨탈호텔 '아시안 라이브' 한식 요리사다-도 맛있다고 하는 걸 보니 맛있는 음식은 호텔같이 근사한 곳에서 먹는 요리가 아니라 친한 사람들과 멀리 서울을 떠나 여행지에서 먹는 음식인 것같다.
이제 안동을 떠날 시간이 다 됐다. 안동의 도산서원, 병산서원과 제비원석불은 다음번에 다시 안동을 찾을 여지를 위해 남겨두기로 하고 다음 장소, 이번 여행의 최종 목적지인 경주로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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